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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에 있어서 묘사와 진술/이지엽

1.
시에 있어서 묘사(description)와 진술(statement)은 매우 중요한 두 축이다. 좋은 시는 묘사와 진술의 절묘한 조화에서 탄생된다. 묘사에 치중한 시는 산뜻해서 보기는 좋지만 깊은 맛이 덜하기 마련이다. 묘사는 언어를 회화적인 방향으로 명료화 시킨다. 가시적(可視的), 제시적(提示的), 감각적(感覺的)이다. 그러나 진술은 언어를 사고의 깊이로 체험화 시킨다. 사고적(思考的), 고백적(告白的), 해석적(解釋的)이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 김남주, 「옛 마을을 지나며」전문

이 작품은 묘사와 진술로 이루워져 있다. '찬 서리'와 '나무 끝'과 '까치'와 '홍시'는 깊어가는 늦가을의 배경을 잡아준다. 을씨년스러운 회색빛 늦가을도 좋고, 높아가다 못해 감청빛인 하늘이라도 좋다. 거기에 따지않고 그냥 둔 홍시 하나. 여기까지는 묘사가 된다. 그것을 시인은 '조선의 마음'이라고 못박는다. 진술이다. '조선의 마음이여'에 와서야 이 시는 빛을 발한다. 지극히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거대하고 큰 사고로 발전한다. 미시적 관찰이 거시적 사고로 나아간다. 둘의 관계는 자연히 상보적이다. 앞의 묘사만 있다면 이 시는 무미의 것이 되고 만다. 역으로 뒤의 진술만 있다면 이 시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묘사가 있기 때문에 진술이 구체적 힘을 얻게 되고, 진술이 있기 때문에 묘사가 생의 깊이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현대 시조에 있어서 묘사와 진술은 어떠한 양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문제점은 무엇인가. 이를 살펴보고 우리 시조의 창작 방향을 바르게 제시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다.

2.
다음의 작품들을 살펴보자.

(1) 매미소리 뚝 끊치고
四季花 주룩 진다

하늘엔 구름 한 자락
조을 듯 머무르고

洋銀빛 볕살이 아리는
추녀끝 빈 거미줄

- 李鎬雨, 「한 낮」전문

(2) 낮 달,
사금파리,
물새 눈부신 죽지

절벽에 부서지는 파도의 큰 눈사태

천년 전 계림(鷄林)을 적신
이차돈의
핏자국

- 조동화, <흰동백> 전문

위의 작품들은 대개 묘사로 이루워져 (1)의 작품은 이를 데 없이 고요한 정적 속에 묻혀있는 한 낮의 정경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회화적이며, 시적묘사로 이루어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洋銀빛 볕살'과 '빈 거미줄'을 연결하여 산뜻한 이미지를 연출하였다. (2)의 작품은 전체가 은유로 이루워져 있다. 원관념은 제목에서 시사되듯 '흰동백'이다. 보조관념은 '낮달'이며 '사금파리'이며 물새의 눈부신 '죽지' 이다. 그것은 다시 '눈사태'로 '이차돈의 핏자국'으로 전개된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보조관념만을 드러내어 한 편의 시를 이룬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인식의 수준이다.

ⅰ) 낮달, 사금파리, 물새 눈부신 죽지
ⅱ) 큰 눈사태
ⅲ) 이차돈의 핏자국

이를 흰동백과 연결해보면 결코 만만한 상상력이 아님을 알게 된다. 비유는 대개 시적 묘사를 가시화 시켜주는 가장 효과적인 수사법이다. (2)의 시는 이를 잘 활용하고 있는데 무관하게 보이는 ⅰ) ⅱ) ⅲ)의 은유는 유의하여 살펴보면 확장은유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것은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으로의 전개라는 점에서, 자연적 상상력에서 역사적 상상력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묘사가 아닌 진술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시적 감동은 겉으로는 무관하게 보이는 것들을 상상력으로 연결한 진술적 표현에서 연유하고 있다.

(3) 마음의 부표(浮漂)였다
삶의 신가루였다

눈을 주면
아득한 별
한줄기 빛이였다

떠도는
영혼의 돛단배
그것은 섬이었다.

- 박시교, <행복> 전문

(3)의 작품 역시 (2)의 작품과 같이 확장은유로 이루워진 작품이다. (2)의 작품이 구상으로 시적 대상을 구상으로 연결했다면 (3)의 작품은 추상의 시적 대상을 구상으로 연결했다. 광활한 바다 위의 한 척 배와 섬 하나. 이 시는 이러한 밑그림을 그려주기 때문에 묘사에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제목 '행복'이 시사하듯 실제의 풍경이 아니라 '영혼'의 풍경이므로 진술에 해당된다.

(4)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오후(午後)

파리 한 마리
손발을 비비고 있다

어덴지 크게 슬픈 일
있을 것만 같아라

- 李鎬雨, 「虛日」전문

(4)의 작품은 (1)의 작품과 동일인의 작품이고, 거의 비슷한 한낮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1)과는 다르다. 초장과 중장은 '파리 한 마리'가 '손발을 비비는' 덤덤한 오후의 실상을 그리고 있는 묘사에 해당되지만, 종장에서는 파리의 손발비빔에서 연유한 '크게 슬픈 일'이 있으리라는 진술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1)의 단순한 산뜻함보다는 생각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중장의 미시적 묘사가 종장의 거시적 사고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3.
현대 시조에 있어 시적 묘사와 진술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 현대 시조의 초기 작품들에서 우리는 결코 만만치않는 묘사와 진술의 절묘한 조화가 빚어내고 있는 수작들을 만나게 된다.

(5)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툼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보소서 빠개 젖힌 이 가슴

- 조운, 「석류」전문

(6) 風紙에 바람일고 구들은 얼음이다
조그만 冊床 하나 무릎 앞에 놓아두고
그 위엔 한 두 숭어리 피어나는 水仙花

투술한 전복껍질 발달아 등에 대고
따뜻한 볕을지고 누워있는 蟹形水仙
서리고 잠들던 잎도 굽이굽이 펴이네

등(燈)에 비친 모양 더우기 연연하다
웃으며 수줌은 듯 고개 숙인 숭이숭이
하이얀 장지문 위에 그리나니 水墨畵를

- 이병기, 「水仙花」전문

조운의「석류」((5))의 구조는 시적 묘사와 진술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워야 하는 지를 잘 보여준다. '투박한∼붉은 뜻을' 까지는 시적 묘사고 '내가 어이∼이 가슴'은 시적 진술이다. 前三句가 묘사이고 後三句가 진술인 셈이다. 아주 경제적으로 배치한 셈이다. 중장의 역할은 묘사에서 진술로 넘어가는 역할을 수행한다. 종장의 충격을 이완시키면서 자연스러움을 유도하고 있다. 이병기의「水仙花」((6))에서 우리는 놀라운 비유와 만나게 된다. '水仙花'를 게의 형상에 빗대어 '투술한 전복껍질 발달아 등에 대고/ 따뜻한 볕을 지고 누워있는 蟹形水仙'으로 본 것이다. 치밀하면서도 독특한 묘사가 우리를 압도한다.

자연을 얘기하면서도 그 精緻함은 바람 한 가닥이나 감정의 한 올까지 잡아낸다. 여기 그 전범이 될만한 두 편을 보기로 하자.

(7) 이마에 마구 짓이기던 그 毒한 꽃물도
몸에 둘렀던 그 짙고 어두운 그늘도
이제는 다 벗을 수밖에……벗을 수 밖에……

채어올린 물고기 그 살비린 숨가쁨
낱낱이 비늘쳐 낸 지난 뜨락에 나서면
보아라, 혼령마저 적시는 이 純金의 소나기

다들 올올 떨며 싸늘한 盞을 서로 대질러
찢긴 남루자락 휘돌아 질펀한 자리
이제는 쉽게 슬플래도 슬퍼질 수가 없어……

허구헌 나날 눈익힌 길은 다시 서툴고
더는 내려설 수 없는 그 어느 돌계단
또 뉘가 낭자한 印肉으로 저 아픔을 찍는가.

- 김상옥, 「가을 뜨락에 서서」전문

(8) 어쩌면 마지막 지휘일지 모르겠다
노구에 연미복 끌며 천천히 등장하는
먼 달빛 조명 받으며 무대중앙 서 있다.
달팽이의 여린 뿔에 휘감기는 우주의 소리
숨 막히는 고요 속에 비밀의 문 열어 놓고
음색도 꺼풀 벗고서 별빛 불러 앉힌다.
숲에 바람이 일고 물면이 들먹인다
이파리와 이파리 사이 밤의 향기 돌며 가고
저 멀리 강물이 뉘인 곳 풀숲들이 웅성댄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가 잡은 지휘봉에 춤추는 우포환상곡
갈채 속 연미복 끌며 점 하나로 사라진다.
- 이상범,「우포 늪」전문

(7)의 작품은 가을의 정경을 감각적으로 그려내었다. 특히 여름과 가을의 대비적 심상이 삶의 단면으로 투영되고 있다. '이마에 마구 짓이기던 그 毒한 꽃물'이나 '몸에 둘렀던 그 짙고 어두운 그늘'은 1차적으로 꽃과 나뭇잎이 여름을 상징하지만 오기와 희망과 좌절 사이를 헤맸던 청춘을 의미한다. 둘째 수 초·중장의 '살비린 숨가쁨' 역시 이와 동일한 심상이다.
후반부인 셋째와 넷째 수에는 표면적인 가을의 모습, 즉 내면적인 생의 원숙기가 비슷한 감도로 채색되고 있다. 각 장은 묘사와 진술이 뒤섞여 있는데 전개에 따라 진술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지고 있음이 주목된다.
(8)의 작품은 달밤 '우포늪'에서 본 달팽이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내었다. 이 작품은 길이면에선 (7)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언술구조를 보여준다. 이 작품의 요체는 4行과 10行에 있으며 이는 곧 시적 진술에 해당된다. 다시말해 이 작품은 묘사(첫째수) - 진술(둘째수) - 묘사(셋째수) - 진술(넷째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진술에 대한 거부감을 최소화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전체적인 구조를 자연스럽게 이끌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진술 → 묘사의 구조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다음 작품은 이와는 반대되는 일면을 보여주는데 작품 大尾의 여운에서 상당한 낙폭을 보여준다.

(9) 예전에,
예전에, 뇌며
꿈꾸는 보리밭에

세상에,
세상에, 뇌다
열 오른 툇마루 앞에

넉넉히 함박눈 오시네,
붉은빛 벙근
하얀
아침.

- 송선영 「院村里의 눈」전문

이 작품은 언뜻 보아 묘사로만 이루워진 작품같지만 초장과 중장은 시인의 해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진술이다. '예전에, 예전에'에 함축된 의미는 믿음과 신뢰가 있었던 과거 지향을 보여주고, '세상에, 세상에'는 불신과 반목의 현실세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게 완연한 마음의 간극을 덮으며 자연은 '넉넉히' 함박눈을 내리고 희망으로 가득찬 '하얀 아침'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끝내기 방식으로 이에 적절한 언술구조는 역시 묘사다. 진술과 묘사는 각기 다른 여운 남긴다. (7)과 같은 완전 진술의 끝내기 방식은 강한 여운은 남기고자 할 때 적절하다. (8)은 진술과 묘사가 같이 쓰인 경우인데 중의적이고 다방향적인 생각을 독자들에게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9)의 경우는 독자들의 생각을 가장 존중해주는 경우로 심각한 진술을 중화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4
시적 묘사와 진술에 대하여 사적으로 좀더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60∼70년대의 작품들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나 보자.

(10) 매이지 말라 매이지 말라/ 무시로 깨워주던// 포장집 소주맛 같은/ 아, 한국의 겨울바 람// 조금은 안됐다는 듯/ 꽃잎 하나 떨구고 간다

- 김제현, 「바람」후반부

(11) 느닷없이 찌가 떨어 잡아채는 잠깐사이
비늘빛만 눈을 가려 아득한 天地間을……
임이여, 그렇게 들면 내마음은 대바구니

- 徐伐, 「낚시 心書」중반부

(12)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 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 이우걸, 「팽이」전문

(10)의 경우 언술구조는 진술 → 묘사 → 진술이다 진술이 먼저 나오는 경우는 대개 그 이유에 해당되는 묘사가 이를 뒷받침해주기 마련이다 '매이지 말라'고 독자에게 요구하는 이유를 '한국의 바람'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그 '바람'을 매몰차고 몰인정하게 그려내지 않고, 오히려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안는다.
(11)의 경우는 시조에 있어서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묘사 → 진술의 언술구조이다. 낚시에 있어 '찌가 떨고, 잡아채는 행위, 비늘 빛이 찬란한 순간'은 모두 묘사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온전히 시인의 주관이 된다. 시인은 진술을 통해 자신에게 속한 (독자들은 초장과 중장에서 행위의 주체를 서정자아인 시인으로 해석하기 마련이다) '아득한 天地間'의 황홀함을 일순간에 '임' 의 것으로 환원시켜 버리고, 자신은 그것을 우러러 처분만 기다리는 '대바구니'로 격하시킨다. 종장의 반전은 시조다운 절정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데 이럴 경우 시적 진술이 어느 정도 통렬하게 쓰이고 있느냐가 작품의 품격을 결정하게 된다. (11)의 경우는 이의 효과가 잘 드러난 경우에 해당된다.
(12)의 경우는 부분적으로 묘사가 섞이긴 했지만 대개 진술의 구조로 되어있다. 시적 대상이 사물일 경우 묘사는 대개 그 사물의 속성을 어떻게 포착해내느냐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팽이에 있어 '매'와 팽이 위에 칠한 색깔과 '꼿꼿이' 서서 돌아가는 것은 팽이의 속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속성을 이미 전제로 깔고 '쳐라'라고 강한 요구를 한다. 그래서 부조리한 세계와 융화되지 못한 세계를 증언하겠다고 한다. '무수한 고통'의 날을 넘어 '접시 꽃 하나'의 평온과 화합의 세계를 희원하고 있는 것이다.
8∼90년대 시인들의 작품에도 그 무늬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13) 마치/ 여름 바다의/ 진저리치는 이마처럼/ 생각의 창을 닦아/ 저리 열리고/ 손뼉쳐 날아오를 듯/ 환히 찍힌/ 햇살무늬

- 이승은, 「아침의 詩」초반부

(14) 포장집 낡은 석쇠를 발갛게 달구어 놓고
마른 비린내 속에 앙상히 발기는 잔뼈
일테면 시란 또 그런 것, 낱낱이 발기는 잔뼈

- 박기섭, 「꽁치와 시」초반부

(15) 그래도 나는 쓰네 손가락을 구부려
떠나는 노래들을 부르고 불러모아
저무는 가내공업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 이달균, 「저무는 가내공업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전문

(16) 아빠의 실종이다, 변변한 유언도없이 수십번까무라쳐 눈이풀려도
죽지를 않던, 우리네배고픔이다, 핍박이다, 빈곤이다

- 정휘립, 「봄은」중에서

(13)에서 (16)까지의 작품은 주로 비유((13)∼(15)는 직유, (16)은 은유)에 의해 작품의 주요 심상이 전개되고 있다. 어떻게 부려쓰느냐에 따라 깊이의 낙폭을 보여준다.
(13)의 경우는 묘사로 이루워져 있다. 묘사로만 잘 쓰여진 시는 산뜻하다. 얼마만큼 충격적이냐가 시의 성패를 가늠한다. '생각의 창'과 '햇살무늬'를 '진저리치는 이마'와 '손뼉쳐 날아오'르는 것에 비유를 하였다. 아침의 푸르름과 환함을 역동적으로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14)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포장집 낡은 석쇠에 올려진 생선을 시로 비유해낸다. 시인은 먹기 좋은 살점의 길을 택하지 않고 '낱낱이 발기는 잔뼈'같은 거칠고 험한 길을 애써 택한다.
(15)의 경우는 더 명료하게 이를 처리하고 있다. 산업화 시대를 지나 정보산업사회에서 가내 공업과도 같은 '손가락 구부려 떠나는 노래'를 부르는 시인은 처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더욱이 '한 줄 시'에 함유된 것이 시조이고, 절제의 미학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지로도 보여 생각의 깊이를 더해준다.
(16)은 '봄'을 더욱더 독특하게 그려낸다. 무능력한 아버지의 '실종'과 '배고픔'의 은유적 표현으로 그려냄으로써 보편적 봄의 이미지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강한 독백적 언술이기에 시적 진술에 해당된다.

4.
8∼90년대 등단한 비교적 시조에 대해 대중화 작업에 진일보된 생각을 담고자 노력하는 <역류> 동인은 최근 두번째 작품집『그믐의 끝』(좋은날, 2000년 4월)을 출간했다. 이 작품들에서도 시적 묘사와 진술적 표현들은 상당히 다양한 빛깔로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7) …알고 보면 그놈에게도 처자식이 딸려있어 그 놈이
죽고 나면 온 집안이 곡성이니,

모기를 탁, 때려쳐서 패죽이지 말아라

- 이종문, 「訓民歌」

(18) 삼춘은 오지 않고 고즈넉한 1003번지
옴팍집 골방에서 세상에 대취한다
저 길들, 창자까지 얼어 나무가지 툭 부러진다

- 박현덕, 「송정리 詩篇 9」후반부

식칼같은/ 비가 오네// 가슴 한 쪽 오려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크렁크렁 속으로 울며// 저 쪽 방/ 구석에 앉아
엘레지의 여왕을 부르네//

- 박현덕, 「송정리 詩篇 10」전문

(17)의 작품은 청유형의 진술이 작품의 주된 뼈대를 형성하고 있다. 「訓民歌」의 전개방식과 어조를 패러디(parody)한 것이라 보여지는데, 이체롭게 느껴진다. 이 이체로움은 어조의 흉내내기와 풍자성에 연유하고 있다. 고투라할지라도 적절히 활용하면 오히려 현대에선 낯설음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자기보다 약자를 업신여기는 세태와 생명 경시의 풍조를 풍자적으로 그려낸 점이 재미를 더하고 있다.
(18)의 경우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 서정의 강한 힘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송정리 詩篇 9」의 종장에서 보둣 진술의 전개가 시적 상상력의 전환을 적절히 유도하고 있다는 점('창자까지 얼어' 붙은 '길'을 겨울의 차디찬 대기 속에 '나뭇가지 툭 부러지'는 것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일거에 돌려놓는 점)과,「송정리 詩篇 10」 초장 첫구의 강렬한 직유에서 연유하고 있다.

동인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적 언술에 있어 부조화나 설익은 표현, 진부한 묘사가 여전히 문제점으로 남아있는 작품들이 상당수 있다.

(19) 안개처럼 스며버린 존재의 일깨움이
숨죽인 채 낮은 곳으로 흘러
내 속에
마른 눈물로 남아
투명하게 열린다
- 「나 여기 서 있습니다」중에서

(20) 마들에 천 사백년 전 흰쌀 같은 싸락눈이
고구마 탄내나는 삼기마을 에두르며
동녘 땅 그리움만큼 포근히도 쌓인다
- 「서동이의 꿈」중에서

(21) 슬픔 없는 맑은 표정, 너는 먼 길 떠나고
너를 이별하고 오는 내 허전한 귀로에
꿈인듯, 아! 정녕 꿈인듯 꽃보라 어지러워라
- 「꽃보라 속으로 너를 보내고」

(22) 역사에 기록된
북간도인줄 알았더니

밥을 찾아 유랑하는
북간도가 될 줄이야

한민족 한의 실타래가
툭 끊어질 날 언제련가
- 「밥」11. 북간도 전문

(19)의 경우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결함이 노출되고 있다. 직유의 묘사가 시상의 명료화나 시적 탄력, 긴장 어느 쪽에도 기여하지 않는다면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한다.
(20)과 (21)의 작품은 비유적 표현이 낡아있거나 애상성으로 빠져버린 경우에 해당된다. (21)의 경우는 종장에서 보게 되는 시적 진술이 지극히 상투적이고 관념화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단점들은 현대시조 창작에 있어 지극히 경계해야 할 요소들이다.

시적 묘사의 참신함이나 혁신성은 시적대상에 대한 비유가 얼마만큼의 시적 距離를 가지고 있느냐의 원론적인 문제에 닿아있다. 『그믐의 끝』에서 무작위로 추출한 다음의 비유를 보자.

가) 떡심풀린 오리처럼 바장이지 말고 잰 걸음으로 가자
나) 석탄 난로처럼 달궈진 칠월도 하순
다) 선풍기가 뱀의 혀처럼 날름날름 체면을 걸면 아이들이 꾸벅꾸벅 조아 리는 고 3교실
라) 끝 모를 기다림에 지칠 때 타령처럼 흘러나갔다
마) 연체동물 빨판 같은 손들이 들이대는 술잔을
바) 서류를 다시 펼치기엔 쓰레기통이 너무 차있다 찢겨진 어린 왕조의 쓰 다버린 史草처럼
사) 감꽃은 피어난다 말없는 가장처럼
아) 마셔도 갈증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어
자) 열렸다 닫히는 입들만 무성영화처럼 아련할 뿐
차) 어느날 껍질만 남을 바람 속의 빈 집처럼
카) 깨꽃같은 웃음이 봉곳봉곳 피어나고
타) 섬 억새 하얀눈물 가슴에 묻어놓고
파) 이름은 지워져야할 또 하나의 마침표
하) 지상은 가장 낮은 곳에서 꿈꾸는 젊은 애인

우선 지적할 수 있는 점은 시조의 형식장치를 감안할 때 보다 절제화된 비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절제는 두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언어의 길이 면이고 하나는 시적 상상력의 빠른 전환을 통해서이다.
다)와 바)의 경우는 첫번째에 해당되고 라), 아), 자) 등은 두번째에 해당된다. 시조는 주지하다시피 언어의 경제성을 가장 중시하는 장르이다. 비유의 대상 (A)와 비유언어 (B) 사이의 미적거리를 가능한 범주에서 최대한 멀리했을 때 언어가 가장 경제적으로 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A)와 (B) 사이에 독자의 몫을 많이 남겨주기 때문이다. 두번째 경우, (A)와 (B) 사이에 독자의 몫을 어느정도 남겨주었는가를 검토해보면 이점은 쉽게 확인이 된다.
부적절한 비유 또한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마)의 연체동물 빨판과 손, 사)의 감꽃의 피어남과 말없는 가장, 차)의 껍질과 빈집, 카)의 깨꽃과 봉곳봉곳 피어나는 웃음, 타)의 섬억새와 하얀 눈물, 파)의 이름과 마침표, 하)의지상과 젊은 애인. 마)·차)와 타)의 경우는 무난한 비유라고 판단되지만 나머지의 경우는 부적절하다. 사)의 경우 피어난다는 개체의 연속성을 지니는 것과 그냥 존재하는 가장의 일 개체 비유에서, 카)는 의태어의 쓰임에서 파), 하)는 무리한 연결에서 그렇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A)와 (B)가 같은 추상이나 같은 구상일 경우, (A), (B)의 관계 설정은 상당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5.
이상에서 현대시조에 있어서 묘사와 진술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시조에 있어 묘사와 진술의 문제는 누가 힘주어 얘기를 해본 적이 없는 다소 생소한 분야이긴 하지만 시조의 형식장치를 감안한다면 현대시조의 창작방법 한 분야로 보다 심도있는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시조의 비평이 인상비평의 수준에서 머무르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시조의 대중화는 다른 어느 것도 아닌 좋은 작품의 창작에서 온다. 시조가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형시라는 프리미엄에 편승하려는 안일한 작가들의 태도와 독자들의 수준을 무시하는데서 비롯되고 있다. 일전에 나는 90년대 신춘문예 당선 시인들의 작품을 살핀 <날아라, 포충망에 걸린 상상력의 새떼여>(신춘문예 당선시집, 태학사, 1999)란 글에서 시적 상상력의 빈곤을 지적한 바 있다. 현재 시조단의 커다란 문제점은 관념화로 치닫는 풍조의 만연에서 오고 있다. 노골화되거나 관습화된 진술은 독자가 설 수 있는 공간을 심하게 훼손시킨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아울러 시적 묘사에 있어서 새롭고 참신한 미적 거리를 확보해서 시조가 타 장르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시적 긴장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러한 점이 보다 존중 되고 심도 있게 논의를 거듭한다면 연시조 일변도의 창작 풍토도 자연히 개선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진정한 시조의 세계화와 대중화를 생각한다면 단시조의 위상을 제고시키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